[일반] 교황 프란치스코의 2021년 3월 기도지향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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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란치스코의 2021년 3월 기도지향 해설
3월 복음화 지향: 화해의 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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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화해 성사의 은총을 더욱 깊이 체험하여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맛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어렸을 적 본당신부님이 강론 중에 해주셨던 이야기 하나가 떠오릅니
다. 어느 날 신부님이 운동복 차림으로 슈퍼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가톨릭 신자로 보이는 자매님 두 분의 다음과 같은 대화를 의도치 않
게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 판공성사 해치웠어? 나는 어제 진작에 해치웠지.”
이 이야기를 나누시며, 어떻게 고해성사를 두고서 해치웠다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며 굉장히 속상해 하시던 신부님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사목자로서 그 신부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는지 이해되는 것은 물론
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해성사를 ‘해치웠다’고 표현하신 그 이름
모를 자매님의 마음도 공감하게 됩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장
부담이 되는 ‘의무’ 중 하나가 바로 고해성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7년 가톨릭 신문사에 의해 실시된 설문조사에 의하면, 냉담자들 가
운데 무려 33.9%가 고해성사에 대한 부담 경감이 냉담을 푸는데 가장
필요한 사목적 배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같은 해 수원교구 복음화국
에 따르면, 쉬는 교우들을 대상을 한 설문에서 전체 응답자의 25.3%가
냉담의 첫번째 원인으로 고해성사를 지적했습니다. 2012년 서울대교구
사목국은, 9개본당 신자들 중 고해성사를 ‘판공성사 때만 한다’는 응답
이 66.9%에 달했다고 합니다. 2018년 춘천교구는, 전 신자들의 75퍼센
트가 고해성사가 부담된다고 답했고, 판공성사만 보거나 일 년에 4번
정도만 성사를 보는 이들이 무려 70퍼센트를 상회했다고 합니다. 이처
럼 신자들은 고해성사에 대해서 풍성한 은총보다는, 그로 인한 엄청난
부담감에 ‘해치워’ 버리고싶은 그런 의무감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이 사
실입니다.
그러나 고해성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엄격합니다. “그리스도교 신
자는 양심을 성실히 성찰한 다음 –- 중략 -- 모든 중죄의 종류와 횟수
를 고백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교회법 제 988 조 ①) 가령 칠죄종의
하나인 간음에 대한 고해에 있어서는 그 대상과 횟수까지 세세히 고해
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부끄럽다고 해서 제대로 고하지 않는
다면, 모고해[1](冒告解)로 더 큰 죄(독성죄)를 짓는 일이 될 수 있습니
다.
이러한 고해성사에 대해 강한 반감을 보이는 신자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자신의 죄를 꼭 사제를 통해서만 하느님께 고백하여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판공성사
제도에 대해서도, 그것이 강제적일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지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성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하고 확고합니다. “모든 신자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에 이
른 후에는 매년 적어도 한 번 자기의 중죄를 성실히 고백할 의무가
있다.”(교회법 제 989 조)
고해성사에 대한 다른 모든 논의들을 뒤로 하고서 우리가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할 점은, 고해성사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
고 당연한 일이라는 점 입니다. 어떻게 하느님과 다른 이들과 자기 자
신에게 지은 죄를 고백하고 통회하고 용서를 청하는 일이 가벼운 일일
수 있겠습니까. 죄에 대한 무거움, 죄로 인한 두려움, 그리고 죄로 인한
부끄러움은 인간의 본성 중하나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하였
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창세기 3장 9-10절)
죄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으로부터 숨어버리게 합니다. 하느님
앞에 서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
게 합니다. 죄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죄로 인한 무거움과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비로소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아버지와 생생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장이 됩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
끼고, 그분 부르심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무한한 자
비와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자기 죄를
부끄러워 하는 그런 마음을 지닐 때야말로, 우리가 가장 진실해지는 순
간 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진실된 순간에 하느님과의
참으로 생생한 만남과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온갖 두려움과 부
끄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부르심에 용기를 내어응답한다면, 그리고
비록 벌거벗은 몸으로 나마 그 분 앞에 겸손 되이 나아간다면 말입니
다. 고해성사를 성실하게 드리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참된 믿음의 행위
일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구하러 가는 데 결코 지쳐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죄
를 말하는 것이 창피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우리 어머니들과 할머니
들이 말씀하시곤 하셨듯이 수천 번 노래지는 것보다 한 번 빨개지는
편이 낫습니다. 우리는 얼굴을 한 번 붉히겠지만 우리 죄를 용서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013. 11. 20. 성 베드로 광장 일반 알
현)[2]
고해성사에 대한 무거움과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줄이거나 덮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그렇게 하려는 시도 자체가 교묘한 악의 유
혹일 수 있습니다. 만약 죄로 인한 모든 중압감을 덮어버리거나 그저
가벼이 치부하려 한다면, 그런 만큼 죄에 대한 통회의 마음 역시 좀먹
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 사랑과 용서로부터 멀어져, 죄의 무
거움에 삶 전체가 짓눌려 버릴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해성
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그토록 단호한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며 판공성사를 준비하는 지금, 우리 모두가 용기를 내
어 성실히 고해성사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언제 고해성사를
드릴지 스스로 날짜를 정하고, 성실히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통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죄로 인한 무거움과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몸서 리 쳐질 때, 우리의 약
함과 가난함이 걷잡을 수 없이 그대로 드러날 때, 바로 그 순간 하느님
께 신뢰를 두고 용기를 내어 나아가길 바랍니다. 교황님이 말씀하신대
로, 수천 번 노래지는 것보다 한 번 빨개지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
다.
‘너 어디 있느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이제는 우리가 알몸으로 그
분 앞에 나설 때입니다. 그분께 성실한 고해성사로 답해야 할 때입니
다. 그리고 그렇게 고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은총
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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