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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교황 프란치스코의 2021년 3월 기도지향 해설

프란치스코
2021-03-03 18:28 3,18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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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란치스코의 20213월 기도지향 해설


3월 복음화 지향: 화해의 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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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화해 성사의 은총을 더욱 깊이 체험하여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맛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어렸을 적 본당신부님이 강론 중에 해주셨던 이야기 하나가 떠오릅니

. 어느 날 신부님이 운동복 차림으로 슈퍼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가톨릭 신자로 보이는 자매님 두 분의 다음과 같은 대화를 의도치 않

게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 판공성사 해치웠어? 나는 어제 진작에 해치웠지.”

 


이 이야기를 나누시며, 어떻게 고해성사를 두고서 해치웠다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며 굉장히 속상해 하시던 신부님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사목자로서 그 신부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는지 이해되는 것은 물론

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해성사를 해치웠다고 표현하신 그 이름

모를 자매님의 마음도 공감하게 됩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장

부담이 되는 의무중 하나가 바로 고해성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7년 가톨릭 신문사에 의해 실시된 설문조사에 의하면, 냉담자들 가

운데 무려 33.9%가 고해성사에 대한 부담 경감이 냉담을 푸는데 가장

필요한 사목적 배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같은 해 수원교구 복음화국

에 따르면, 쉬는 교우들을 대상을 한 설문에서 전체 응답자의 25.3%

냉담의 첫번째 원인으로 고해성사를 지적했습니다. 2012년 서울대교구

사목국은, 9개본당 신자들 중 고해성사를 판공성사 때만 한다는 응답

66.9%에 달했다고 합니다. 2018년 춘천교구는, 전 신자들의 75퍼센

트가 고해성사가 부담된다고 답했고, 판공성사만 보거나 일 년에 4

정도만 성사를 보는 이들이 무려 70퍼센트를 상회했다고 합니다. 이처

럼 신자들은 고해성사에 대해서 풍성한 은총보다는, 그로 인한 엄청난

부담감에 해치워버리고싶은 그런 의무감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이 사

실입니다.

 


그러나 고해성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엄격합니다. “그리스도교 신

자는 양심을 성실히 성찰한 다음 - 중략 -- 모든 중죄의 종류와 횟수

를 고백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교회법 제 988 ) 가령 칠죄종의

하나인 간음에 대한 고해에 있어서는 그 대상과 횟수까지 세세히 고해

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부끄럽다고 해서 제대로 고하지 않는

다면, 모고해[1](冒告解)로 더 큰 죄(독성죄)를 짓는 일이 될 수 있습니

.

 


이러한 고해성사에 대해 강한 반감을 보이는 신자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자신의 죄를 꼭 사제를 통해서만 하느님께 고백하여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판공성사

제도에 대해서도, 그것이 강제적일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지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성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하고 확고합니다. “모든 신자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에 이

른 후에는 매년 적어도 한 번 자기의 중죄를 성실히 고백할 의무가

있다.”(교회법 제 989 )

 


고해성사에 대한 다른 모든 논의들을 뒤로 하고서 우리가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할 점은, 고해성사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

고 당연한 일이라는 점 입니다. 어떻게 하느님과 다른 이들과 자기 자

신에게 지은 죄를 고백하고 통회하고 용서를 청하는 일이 가벼운 일일

수 있겠습니까. 죄에 대한 무거움, 죄로 인한 두려움, 그리고 죄로 인한

부끄러움은 인간의 본성 중하나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하였

.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창세기 39-10)

 


죄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으로부터 숨어버리게 합니다. 하느님

앞에 서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

게 합니다. 죄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죄로 인한 무거움과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비로소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아버지와 생생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장이 됩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

끼고, 그분 부르심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무한한 자

비와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자기 죄를

부끄러워 하는 그런 마음을 지닐 때야말로, 우리가 가장 진실해지는 순

간 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진실된 순간에 하느님과의

참으로 생생한 만남과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온갖 두려움과 부

끄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부르심에 용기를 내어응답한다면, 그리고

비록 벌거벗은 몸으로 나마 그 분 앞에 겸손 되이 나아간다면 말입니

. 고해성사를 성실하게 드리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참된 믿음의 행위

일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구하러 가는 데 결코 지쳐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죄

를 말하는 것이 창피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우리 어머니들과 할머니

들이 말씀하시곤 하셨듯이 수천 번 노래지는 것보다 한 번 빨개지는

편이 낫습니다. 우리는 얼굴을 한 번 붉히겠지만 우리 죄를 용서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013. 11. 20. 성 베드로 광장 일반 알

)[2]

 


고해성사에 대한 무거움과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줄이거나 덮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그렇게 하려는 시도 자체가 교묘한 악의 유

혹일 수 있습니다. 만약 죄로 인한 모든 중압감을 덮어버리거나 그저

가벼이 치부하려 한다면, 그런 만큼 죄에 대한 통회의 마음 역시 좀먹

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 사랑과 용서로부터 멀어져, 죄의 무

거움에 삶 전체가 짓눌려 버릴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해성

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그토록 단호한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며 판공성사를 준비하는 지금, 우리 모두가 용기를 내

어 성실히 고해성사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언제 고해성사를

 드릴지 스스로 날짜를 정하고, 성실히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통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죄로 인한 무거움과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몸서 리 쳐질 때, 우리의 약

함과 가난함이 걷잡을 수 없이 그대로 드러날 때, 바로 그 순간 하느님

께 신뢰를 두고 용기를 내어 나아가길 바랍니다. 교황님이 말씀하신대

, 수천 번 노래지는 것보다 한 번 빨개지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

.

 


너 어디 있느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이제는 우리가 알몸으로 그

분 앞에 나설 때입니다. 그분께 성실한 고해성사로 답해야 할 때입니

. 그리고 그렇게 고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은총

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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