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성인 (1787~1839.05.24)
생애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1801년 신유박해 때 많은 순교자를 낸 경기도 광주 이씨의 양반가문에서 1787년에 태어났다. 성인은 1800년 경에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고 부인과 동생에게도 천주교에 입교하기를 권유하여 함께 입교시켰다.
그 후 성인은 3남매(큰딸,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부인과 함께 열심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다.
1839년 4월 8일 밤에 포도청의 포장과 포졸들이 성인의 집을 급습하는 일이 생겼으며 이때에 다른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성인은 포도청과 형조에서 혹독한 신문과 고문을 받았지만 배교의 강압과 유혹을 끝내 이겨내었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동료 교우들(남명혁, 권득인, 이소사, 김아기,한아기,박아기, 김업이, 박희순)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입교과정
성인은 어려서 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스스로를 절제하는 일이부족하여,젊어서는 매우 방종한 생활을 하였고 결혼한 연후에도 그러한 방탕한 성격은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한 천주교인을 만나 천주교에 대한 가르침을 들으면서 지금까지의 삶을 깊이 반성해 보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를 열심히 쫓아 다니면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하여 듣게 되면서 점차로 자신의 죄를 통회하게 되었다.
마침내 성인은 천주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길이라고 여기고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아 입교하였다.
이로써 성인은 지난 날의 방탕했던 생활을 크게 뉘우치고 은총의 도움으로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신앙생활


여러 번에 걸친 박해로 인해 가세가 기울어 가는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었지만 성인은 참다운 통회와 참회 정신으로 수난을 인내롭게 극복해 나갔다.
오히려 성인의 어려운 생활을 보다 못한 교우들이 서소문 밖 '고마창골'에 성인을 위해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해 주게 되었고 교우들은 성인의 집을 공소로 이용하게 되어 이 때부터 성인은 자연스럽게 교우들의 회장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성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외교인들을 입교시키는 일과 병자들을 찾아 위로하는 일, 부인과 함께 공소를 돌보는 일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으며 성사를 받기 위해 모인 교우들과 신부님을 지성으로 보살피고 모시기에 힘쓰며 살았다.
입교 후 성인은 언행을 삼가고 규범있는 사람으로 변하여 갔으며 진실한 회개와 극기 생활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보여 모든 이들의 표양이 되었던 것이다.
시복시성
1925년 7월 25일에 한국의 순교자 79명이 교황 비오11세에 의해 시복되었는데 이 때에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복자품에 올랐다.
기해박해 시기에 함께 순교한 부인 권희 바르나바와 큰 딸 이 아가다, 그리고 동생 이광렬 세자요한도 이날 함께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려져 한국의 103위 성인 중에 한 분이 되었다.
우리 본당은 1986년 8월 16일 현 위치에서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주보 성인으로 하여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