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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10월 14일 절두산 도보성지순례를 위한 성지안내_1

시몬
2012-10-04 10:39 1,33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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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4일 절두산 성지까지 도보성지순례를 합니다.
순례에 앞서 성지순례 자료를 올려드립니다. 
워크북을 나눠드릴 예정이지만 지면 관계상 일부는 게시판에 올려드립니다.
잘 읽어 보시고 당일 순례에 도움이 많이 되셨음 좋겠습니다.

절두산 성지

조선조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절두산의 옛 이름이 가을두(加乙頭) 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강변의 명승지로 그 풍경이 뛰어나서 문인들의 발길이 잦았고 중국 사신들이 오면 빼놓지 않고 다녀갔을 만큼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이 병인년(1866년) 천주교 박해(병인박해)로 수 많은 신자들이 목이 잘리어 숨진 뒤 절두산(切頭山:머리가 잘림)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이렇듯 역사의 흔적들을 그대로 간직한 절두산에 기념관을 세워 그 당시의 사회와 문화와 그시대를 살던 선조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많은 유물과 자료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의 설계는 산의 모양을 조금도 변형시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공모하여 서울대 미대 교수인 이희태(李喜泰)씨의 설계가 채택되었다. 기념관은 순교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면서 한국적인 토착성과 전통적인 고유미를 살리는 데 역점을 두어 설계되었다. 궁궐의 기둥과 같은 화랑의 원주, 옛 초가집 지붕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미끄러져 내린 추녀, 조상들이 쓰던 갓 모양을 하고 있는 성당의 천개, 이런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옛 정취와 포근한 정감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성당의 평면은 부채살형으로써 초점인 제단에서의 성찬과 말씀이 반사되어 바깥 세계로 퍼져 나가 모든 인간에게 전해지는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다. 

이렇듯 건물 설계자체뿐 아니라 건물 주변 곳곳은 어느 하나라도 놓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서강(西江)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切頭山)이 된 데에는 가슴 시린 아픔이 있다.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 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두른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절두산에서의 기록에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일가족, 그 해 10월 22일 부인 김억분, 아들 이붕익과 함께 함수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일가를 비롯한 30명 남짓 외에는 전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1966년 병인박해 1백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로 그 자리에 순교 기념관이 선다. 무심히 흐르는 한강물 속에 애달픈 사연들은 기념관이 서고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머무르면서 오늘날에 다시 되살아난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있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또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가눌 길이 없다. [편집자 주 : 2000년 11월말 절두산 순교 기념관과 꾸르실료 회관 사이에 웅장한 절두산 순교 기념비가 제작 설치되었다]

서소문 밖, 새남터, 당고개 등 큰 소리로 부르면 화답할 수 있는 순교지들은 도시의 소음에 묻히고 아파트 그늘에 가려 그 옛날의 아픔도 함께 가려진 듯하다.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과 같이 고요함속에서도 우리에게 굵고 강한 목소리로 소리 높여 꿋꿋한 신앙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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