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4일 절두산 도보성지순례를 위한 성지안내_2 (28위 성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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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순교 성지에 모셔진 28인 성인 명단
절두산 성지 성해실에 모셔진 28위 입니다.
라틴어로 순교자를 MARTYR라고 하는데 증인, 증거, 참관인이라는 뜻이다. 순교자는 진리의 증인들이다. 무엇때문에 순교자들은 가장 귀한 생명을 무엇을 위하여 바쳤을까?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히 생명보다 더 귀한 가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묵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아 남게 될 것이다.”(요한12:24~25)라고 말씀 하셨다. 순교자들은 “죽어야 산다”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죄악의 죽음을 죽이는 부활을 위한 죽음이듯이, 우리 순교자들은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쳤기에 후손인 우리들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자랑스러운 순교자의 후손인 우리들도 순교정신을 현세에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고, 낭비와 사치를 하지 않으며 이기심을 극복하여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생명운동인 것이다.
그 분들의 삶을 되새겨 봅니다.
이호영(베드로) 36세 1838.11.25 광희문 옥사
성 베드로 이호영은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후 어려서 입교하였는데, 부친이 대세를 받고 사망하자 모친과 누이 이소사(아가타)와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에 열성을 다 하였다.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을 성실하게 처리하였다.
1835년 2월에 한강변 무쇠막에서 누이 이 아가타와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당하면서 갖은 형벌을 받았다.
감옥 안에서의 고통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여러 차례 혹형을 당하여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살이 터져 피와 고름이 흐르며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을 정도였는데 그 후로도 형조로 이송되어 3차의 형문을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감옥에는 악취는 물론 굶주림에 지친 사람은 더러운 지푸라기를 뜯어 먹기도 하고 이까지 잡아먹었다고 한다.
성인은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했지만 비명 한마디 없이 참아 내어 인내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형조에서 내린 사형선고의 글귀 중에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는 문구를 보고,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거룩하고 참된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수결(手決)을 거부하였다. 형리는 억지로 손을 끌어다가 찍게 하였다.
4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온화한 모습을 항상 보여주면서 기도를 계속하였고, 누이와 함께 순교하기를 원하였지만, 옥에서 얻은 병으로 끝내 1838년 11월 25일 주님의 나라로 갔다.
이영희(막달레나) 31세 1839.7.20 서소문밖 참수
성녀 막달레나 이영희(李英喜)는 성녀 허계임의 딸이며 성녀 이정희의 동생으로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가난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고모 이매임의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입교하여 열심히 살았지만, 완고한 아버지는 천주교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몰래하였다.
성장하면서 수정(守貞)을 결심하였고 집에서 혼인시키려고 준비하는 것을 보고,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위장하여 집을 떠나 고모인 이매임의 집으로 가서 함께 수계하며 살았다. 이미 순교한 교우들의 위대한 신앙정신과 어떤 고통도 이겨냈다는 말을 듣고 순교의 열의가 가득하던 중, 고모와 언니 등 다른 교우들과 함께 1839년 4월에 포졸들에게 가서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에서 모두 7차의 신문과 형문을 당했으나 한결 같은 신앙으로
이를 이겨내고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동저의 몸으로 순교
하여,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 안으로 뛰어 들었다.
이정희(바르바나) 40세 1839.9.3 서울옥사
성녀 바르바라 이정희(이정희)는 성녀 허계임의 딸이면서 성녀 이영희의 언니로, 경기도 봉천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집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입교했다. 비신자인 아버지는 비신자와 결혼시키려 하였는데, 그의 양심이 허락치 않아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3년 동안을 앉은뱅이 노릇을 했다. 결국 신자인 청년과 결혼하였지만 결혼 후 2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잠시 친정에 있다가 상경하여 고모와 동생과 함께 살면서 열심히 수계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이해 4월초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순교를 결심한 후 당시 한집에 함께 살고 있던 이매임, 이영희, 김성임, 김루시아, 그리고 성사를 보러 상경한 어머니와 함께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했다 . 그후 포청과 형조에서 여러 가지 고문과 혹형을 끝까지 이겨내고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영원한 천국의 문으로 들어섰다.
최경환(프란시스코) 35세 1839.9.12 서소문밖 옥사
성 프란치스꼬 최경환(崔京煥)은 두 번 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의 아버지로 충청도 홍주의 다래골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 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왔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신앙인의 본분을 지켜왔다. 결혼한 다음에는 보다 열심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가족들과 상의한 끝에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마을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곳 외교인들의 탄압으로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에 정착, 교우촌을 건설하고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몰두하였다. 1836년, 큰 아들 최양업을 모방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성인의 신심은 자신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끼쳐 괄괄하고 불같은 성격을 믿음의 정신으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주위 사람들은 그의 본래 성품이 온순한 것으로 알고 온화한 그의 성품에 탄복했었다 한다. 최양업 신부에 의하면 "아버지는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깊은 묵상과 신심서적 읽기에 열성을 보여 교회의 가르침에 놀랄만한 지식을 취하셨다"며 "또한 아버지는 천주에 대한 열성과 한가지로 사람에 대한 박해심이 열렬하여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가난한 이웃을 위한 몫으로 남겨놓으셨다"고전한다.
1839년 수리산 공소 초대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곧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였으며 교우들을 위로 격려하면서 돌보아주던 중 그해 7월 31일에 서울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들과 일가 등 40여 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아들을 나라밖으로 내보내어 신학공부 시킨다는 죄가 더 추가되어 남달리 혹심한 고통과 형벌을 받았다.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그해 9월 11일 최후로 곤장 50도를 맞고 그 다음날 옥중에서 일생을 마쳐 순교의 놀라운 기쁨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갔다.
앵베르 범주교 43세 1839.9.21 새남터 군문효수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범세형, 范世亨 ; Imbert, Lurent Marie Joseph) 주교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18일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고, 다음해 3.20일 파리를 떠나 중국 사천교구로 가서 전교활동 중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837년 12월 17일에 봉황성 변문에 도착, 그 다음날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조선 땅을 밟은 첫 주교가 되었다. 이미 입국한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전교에 힘쓴 결과 1839년 초에는 9,000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로 교회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성직자 양성에 힘을 쏟아 세 소년을 유학 보냈고, 어른으로서 적임자를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등 교회발전에 다각적인 노력을 하였다.
1839년 7월 3일 포졸 앞에 자수하였고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라는 극형으로 순교하여 이 땅의 복음화의 뿌리가 되었다.
모방 나신부 36세 1839.9.21 새남터 군문효수
성 베드로 모방(나백다록, 羅伯多祿 ; Maubant, Pierre Philibert)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 프랑스에서 태어나 1829년 5월 13일에 신부가 되었고,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이듬해 중국 사천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조선교구장 브위기에르 주교를 만나 조선선교사가 되기로 자원하였다.
1836년 1월 12일 조신철, 정하상 등의 인도로 입국,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와서 존선말을 공부하며 경기도와 충청도 교우촌을 방문, 200여 명에게 영세를 주었고,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세 소년을 뽑아 최초 신학생으로 마카오로 보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1839년 앵베르 주교의 권면으로 9월 6일 홍주 근처에서 대기중인 포졸들에게 자수한 다음, 9월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여 천국의 문턱을 넘어갔다.
샤스탕 정신부 36세 1839.9.21 새남터 군문효수
성 야고보 샤스탕(정아각백, 鄭牙各伯; Chastan, Jacques Honore) 신부는 1803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827년에 신부가 되어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마카오에 도착했다. 조선으로 떠나는 브르기니에르 주교에게 조선 포교지를 자원하였고, 1836년 12월 31일,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의 안내로 변문을 통과하여 이듬해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각 지방 교회를 다니면서 상제 옷을 입고 산길을 헤매었으며, 음식과 일상생활에 대한 불편은 물론 밤새도록 성무 집행하는 고통을 다른 선교사와 같이 겪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후, 이미 체포된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확대되어 신자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교사들의 자수를 권고하자 순명하여 모방 신부와 같이 자수하였다. 9월 21일 새남터에서 앵베를 주교, 모방 신부와 함께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밑바탕이 되었다.
허계임(막달레나) 67세 1839.9.26 서소문밖 참수
성녀 막달레나 허계임(許季任)은 성녀 이정희.이영희 자매의 모친으로, 경기도 용인지방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남편 이씨는 완고한 외교인으로 천주교를 몹시 싫어하였으므로 남편 몰래 시누이 이매임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두 딸과 함께 입교하였다.
1839년 3월 성사를 받으러 서울로 가서 시누이와 두 딸이 사는 집에 머무르고 있던 중,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누이와 두 딸 그리고 김성임과 김 루시아 등과 함께 순교를 결심한 뒤 4월 11일 그들과 같이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수차의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기꺼이 이겨내고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막달레나 허계임에 대한 기록은 아쉽게도 두 자매를 훌륭히 키우고,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혹형을 기꺼이 받아냈다는 점 밖에 나타나지 않고 있어 성인을 흠모하는 교회로서는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두 순교자의 어머니로서 자신 또한 순교자가 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그를 따르려는 이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김성우(안토니오) 47세 1841.4.29 서울 참수
성 안또니오 김성우(金聖禹)는 경기도 광주 귀산에서 부유한 가정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천주교를 알게 되자 두 동생과 함께 곧 입교, 열렬한 신앙으로 친척과 이웃에게 전교하여 자신의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 뒤 중년에 이르러 양친을 여읜 다음 서울로 이사하였고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으며,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의 집을 공소로 개조하고 교우들을 돌보며 신부를 보필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하였는데, 고향 구산에 남아있던 두 동생만 체포되어 큰 동생 김덕심은 1841년에 옥사했고, 작은 동생은 여러 해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피신해 있던 김성우도 1840년 1월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기꺼이 이겨냈고, 오히려 감옥을 자신의 집처럼 생각하며 함께 갇힌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여 그중 두 명을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1841년 4월 28일 치도곤 60도를 맞은 후 이튿날인 4월 29일 15개월 동안의 긴 옥살이 끝에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자신이 가르친 천주님을 직접으로 영원히 바라보고 기뻐하게 되었다.
김대건(안드레아) 25세 1846.9.16 새남터 군문효수
성 안드레아 김대건(金大建)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나 순교자인 증조부와 부친의 영성을 배우며 자라났다.
1836년 16세 때에 최방제 프란치스꼬와 최양업 토마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이듬해 마카오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1844년 부제품을 받았으며, 1845년 8월 17일 상해 부근 긴가함(金家巷)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귀국한 후 국내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 신부들의 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 6월 5일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연락을 취하고 돌아오는 길에 체포되었다.
해주 감영과 서울에서 4차의 문초와 40차례의 신문을 받는 동안 김 신부의 탁월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한 일부 대신들은 배교시켜 인재로 등용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이를 거절하고 관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자 끝내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 만에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였지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정신을 만인들에게 일깨워 주고자했다
베르뇌 장주교 52세 1866.3.7 새남터 군문효수
성 시메온 베르뇌(장경일, 張敬一 ; Berneux, Francois) 주교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37년에 신부가 되어 2년 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1841년 베트남 통킹에 도착하여 전교하다가 체포되어 2년간 옥살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에서 12년 동안 전교하였다. 1854년 12월에 주교로 성성되었고, 이듬해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에 입국하였다.
경향 각처를 숨어 다니며 선교하면서 베론에 신학교를 세우고, 서울에 2개의 인쇄소를 차리는 등 10년 동안 조선교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1866년 2월 23일, 서울 홍봉주의 집에 거처하던 중 하인 이선이의 고발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여 무수한 순교자 대열에 들었다.
도리 김신부 27세 1866.3.7 새남터 군문효수
성 헨리꼬 도리(Dorie, Pierre Henri ;김신부) 신부는 동료들로부터 "꼬마" 또는 "방데지방의 작은꽃"이라 불리었는데 1839년 9월 23일, 즉 순교자 앵베르, 모방, 샤스땅 등이 조선에서 순교한 다음다음날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1864년 5월 21일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즉시 모국을 떠나 동료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다. 경기도 용인의 손골에 배속되어 이군옥의 집에서 기거하며 사제로서 전교 활동을 하던 중 새해를 맞아 볼리외 신부와 함께 상경하여 베르뇌 주교 댁에 과세하고 다시 내려갔다가 1866년 2월 27일에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와 다른 동료 신부 2명과 함께 군문효수로 영광된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
볼리외 서신부 26세 1866.3.7 새남터 군문효수
성 루이 볼리외(서몰례,徐沒禮: Beaulieu, Bernard Louis)신부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62년 부제품을 받은 후 이듬해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고, 1864년 사제서품을 받음과 동시에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865년 다른 동료 신부들과 함께 입국하였다.
1866년 2월 경 볼리외 신부는 서울에서 몇 십리 떨어진 광주의 묘론리에 머물고 있으면서 고해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조선말을 배우고 공주지방에 배속되었으나 임지에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하기 전에 박해를 받았다.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 교우집에 피신해 있던 중 1866년 2월 27일 체포되었다. 3월 7일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와 다른 동료 신부 2명과 함께 군문효수로 순교하여, 인자하신 주님의 나라에서 끝없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브르트니에르 백신부 28세 1866.3.7 새남터 참수
성 유스티노 브르트니에르(白신부 ; Breteni res, 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신부는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 중 유일한 귀족의 후손으로 1838년 프랑스 디종에서 태어났다. 1861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1864년 신부가 되어 도리(김) 신부,위앵(민) 신부와 함께 베르뇌 주교의 요청에 의해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65년 5월에 충청도 내포를 통하여 입국,서울의 정의배 회장 집에 머무르면서 정회장에게서 한국어와 풍습 등을 배웠다.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 1866년 2월 25일에 체포되었고,3월 7일 새남터에서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남종삼(요한) 54세 1866.3.7 서소문밖 참수
성 남종삼(南鐘三) 요한은 충주지방에서 태어났으며, 22세 때인 1838년 문과에 급제하여 철종 때에는 승지가 되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왔으나 나라의 공식적인 의식이 있을 때는 교리에 지나친 조상 숭배행위에 참여해야 하였으므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한때, 가문의 생계를 꾸려야하는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관직을 떠나 가정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에 열중하며 외국신부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1863년에 생활의 궁핍으로 다시 승지의 관직에 일하게 되었는데, 1864년 이후 국경을 넘나드는 러시아 배 문제로 대원군 부인 민씨는 조선에 와 있는 프랑스선교사에게 이일을 의뢰하기 위해 남요한을 부르기도 하였다.
천주교를 반대하던 대신들이 박해를 탄원하자 1866년 천주교 박해령이 내렸고, 남요한 역시 체포되었다. 의금부에 마련된 국청에서 6차에 걸쳐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주교 등 다른 교우들과 함께 엄중 문초를 당하였다. 1866년 3월 7일,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홍봉주와 같이 참수형을 받아 하늘나라에서 순교 성인이란 지위를 얻었다.
최 형(베드로) 57세 1866.3.10 서소문밖 참수
성 베드로 최형(崔炯)은 일명 치장으로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서울 남문 밖에서 살았다. 14세 때 입교하였으며 동생 최방제는 김대건, 최양업과 함께 마카오에 유학하여 그 곳에서 병사하였고, 형 최수는 1866년 절두산에서 참수하였으며, 큰누이는 평생을 동정으로 살았다.
이러한 독실한 교우가정에서 성장한 최형은 1836년 모방신부의 복사로 여러 해 동안 신부를 보필하며 전교에 힘썼다. 그 후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로는 목수일을 하며 묵주 만드는 일과 교회서적 간행을 도왔다. 베르뇌 주교의 입국 후에는 교회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교회서적 출판에 크게 공헌하였다.
1866년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면서 적발된 많은 교회서적들 때문에 체포되어 3월 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동료 전장운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최형 성인의 사형선고문에는 "혹심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고 쇠나 돌같이 고집이 세어 사교를 단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또 진리를 고백하면서 사형선고문에 직접 서명까지 하였으니 이에 국법을 따라 마땅히 사형에 처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성인의 거룩한 고집에 머리가 숙여진다.
우세영(알렉시오) 22세 1866.3.11 새남터 군문효수
성 알렉시오 우세영(禹世英)은 일명 세필로 황해도 서흥의 향교골에서 태어나, 총명한 재주로 18세 때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우연히 만난 김기호 회장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관직에 뜻을 버리고 입교했다.
서울로 올라와 정의배 회장에게 교리를 배우고 베르뇌 주교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후 고향으로 돌아와 천주교를 반대하던 부모와 가족들을 인내와 열정으로 권면하여 입교시킨 다음,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 가족과 함께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 2월 16일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축일을 지내다가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평양감영에서의 혹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석방되자 배교한 것을 크게 뉘우치고 스승 정의배를 만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정의배의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3월 11일 프랑스 신부 둘과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여 천국의 과거에 훌륭하게 급제하였다.
다블뤼 안주교 48세 1866.3.30 보령갈매못 군문효수
성 안토니오 다블뤼(안돈이, 安敦伊;Daveluy, Marie Antoine Nicolas)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1841년 2월에 고국을 떠나 1844년 9월 말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요청으로 조선선교사로 임명되어 1845년 10월 12일 강경포에 입국, 21년 동안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교황청으로부터 성모무염시태를 조선교회의 새 주보로 받았고, "성모성심회"를 창설하여 성모로부터 받은 은혜를 감사하였다. 그의 업적 중 기억할 만한 것은 "한한불자전"(漢韓佛字典)과 한국 천주교회사 및 조선 순교사를 편찬으로, 자신이 조사 발굴한 많은 순교 자료들은 파리 수도회 본부로 보내어져 후일 달레(Dallet)의 유명한 "한국천주교회사"가 저술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충청도와 경상도를 다니면서 전교하던 중 체포되어 충청도 보령의 수영으로 압송되었고, 보령 바닷가에서 3월 30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자의 영광을
얻어, 성모님의 손을 잡고 천국으로 향했다.
오메트리 오신부 29세 1866.3.30 보령갈매못 군문효수
성 베드로 오메트르(Pierre, Aumaitre ; 吳신부) 신부는 프랑스 앙굴램 교구의 에적(Aizecq)에서 태어났다. 1862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6월 14일 서품되어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63년 입국하여 수원 근방 샘골(泉谷里)에서 조선어를 익히고 곧 다블위 주교가 전교하고 있던 충청도 지방으로 내려가 전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위앵 신부와 함께 자수하였다. 3월 30일 충청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장주기, 황석두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아 천국의 위대한 가족이 되었다.
위앵 민신부 30세 1866.3.30 보령갈매못 군문효수
성 마르티노 루가 위앵(민신부; Huin, Martin Luc) 프랑스 기용벨에서 태어났다. 1861년에 랑그르교구 소속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어 2년 동안 보좌신부로 있다가 1863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이듬해 조선선교사로 임명되어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와 함께 중국을 거쳐 1865년 5월 27일 충청도 내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였다.
다블뤼 주교에게 조선어를 배운 후 충청도 지방에서 전교하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3월 11일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자수하였다. 그해 3월 30일 충청도 보령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 그리고 장주기, 황석두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천국의 영원한 제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세례명이 "루가"나 "마르티노"로 표기된 문헌도 있음)
장주기(요셉) 64세 1866.3.30 보령갈매못 군문효수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은 일명 낙소(樂소)라고 하며, 경기도 수원의 느지지에서 태어났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친척들의 반대와 박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어서 빨리 훌륭한 신부가 많이 나오게 해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봉사하였다.
1866년 3월 1일 포졸들이 배론신학교를 습격하여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하자 제천 근처의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였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3월 30일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군문효수로 전능하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황석두(루가) 54세 1866.3.30 보령갈매못 군문효수
성 황석두 루가(1813~1866)는 과거를 보러 상경하는 도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를 했고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했다. 그의 뛰어난 교리 지식과 덕행으로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를 거쳐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다블뤼 주교를 도와 교회서적 번역하고 출판에 관계하던 중 1866년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당하는 다블뤼 주교를 뒤따라 가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사형선고를 받고 충남 갈매못에서 군문효수를 받고 순교하였다.
손선지(베드로) 48세 1866.12.13 전주숲정이 참수
성 베드로 손(孫)선지는 일명 승운으로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입교한 후로 열심히 수계했고, 샤스탕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회장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면서 자신의 집을 공소로 상용하고 있었는데, 그해 12월 5일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전주감영에서의 신문 중 회장임이 탄로나 공소를 거쳐 간 서양신부와 교회서적의 출처를 알려는 관헌들에게 매우 잔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옥중에서도 회장의 직물를 다하였으며 함께 갇힌 교우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12월 1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대성동과 성지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주님의 거룩한 집으로 올라갔다.
이명서(베드로) 45세 1866.12.13 전주숲정이 참수
성 베드로 이(李)명서는 일명 재덕으로 충청도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신앙문제로 고향을 등지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며 살았다.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에 전주 부근의 교우촌인 성지동에 정착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확산되자 전라도 지방에서는 교우촌인 성지동과 대성동이 제일 먼저 피해를 입게 되어 12월 5일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조화서 조윤호 부자, 정원지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되기 전 중병에 걸려 조화서가 여러 번 피신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뿌리치고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에서는 중병에 있는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제일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했다. 그러나 내가 몇 번 죽는 한이 있어도 천주를 버릴 수 없습니다"하고 모든 고통을 이겨내면서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함께 열렬한 기도로써 순교의 자세를 준비하였다.
12월 1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대성동과 성지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이 세상의 방랑생활을 끝내고 참 고향인 천국으로 올라갔다.
한재권(요셉) 31세 1866.12.13 전주숲정이 참수
성 요셉 한(韓)재권은 세례명이 베드로라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일명 원서로 충청도 진잠에서 태중교우로 내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착한 모범을 따라 열심히 살았으며 진잠 지방에서는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박해를 피해 전주 대성동으로 이사한 후로는 아무런 직책없이 헌신적으로 교회 일을 도우면서 모든 이의 모범이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전라도 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어 이해 12월 5일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정문호, 손선지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부친이 친구를 통하여 석방 교섭을 벌이는 한편 옥까지 찾아와 배교할 것을 간청하였지만 "배교란 말은 부당합니다. 아버님이 아무리 그러셔도 소용없습니다"하고 말하면서 거절하였다.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참 아버지이신 천주님을 직접 뵈옵고 영원히 흠숭하게 되었다.
정문호(바르톨로메오) 65세 1866.12.13 전주숲정이 참수
성 바르톨로메오 정문호(鄭문호)는 일명 계식으로 충청도 임천에서 양반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많이 하여 고을원님까지 지냈고,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분으로 영세한 다음부터는 모든 관직을 버렸다.
품행이 단정하고 성격이 강직하여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들까지 존경을 하였다. 박해를 피해 고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며 살다가 병인박해 때에는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고 있었다.
1866년 12월초 사람들을 시켜 박해에 대한 전주감영의 동태를 살피러 보냈으나 그 소식을 듣기도 전에 12월 5일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한재권, 손선지 등과 함께 체포되어 12월 1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하기 직전 옥중에서 항상 기도로써 순교를 예비했고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은 우리가 천국으로 과거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하며 진심으로 자신의 순교를 기뻐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주님께 바쳤다.
이윤일(요한) 44세 1867.1.21 대구관덕정 참수
성 요한 이윤일(李尹一)은 일명 제헌으로 충청도 홍주에서 열심한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경상도 문경의 여호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 지역에까지 미치게 되어, 그해 11월 가족들과 마을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관아에서 3일 동안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다. 상주에서 한달에 세 번씩 석달 동안 9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다시 김회장 형제와 함께 사학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으로 끌려 나갔고, 집행관이 선고문을 낭독하자 요한은 희광이에게 돈을 꺼내주며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에게 줄 터이니 받아서 요긴하게 쓰게나. 그 대신 부디 한 칼에 내 목을 베어주게나"하였다. 참수형으로 순교하여 천국의 영원한 가족이 되었다.
성명 미상(1838~1841)의 순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