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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10월 14일 절두산 도보성지순례를 위한 성지안내_4 (그외 상세한 이야기)

시몬
2012-10-04 10:47 2,27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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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성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이 상당히 길지만 우리의 순교역사를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 꼭 한 번씩 읽고 가시기 바랍니다.
역시 내용이 길어 성지순례 때 나누어줄 인쇄물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절두산 성지 이야기

양화진과 절두산의 옛이름 

양화진은 지금의 금천구에 해당하는 금천현 북쪽, 양화교 부근쯤에 있었는데, 나루 인근 강변에 갯버들이 많았기 때문에 ‘버들꽃나루’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양화진이 언제부터 나루의 역할을 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곳이 국가로부터 주목을 받는 나루가 된 것은 고려 말부터였고, 공식적으로는 《고려사》에 처음으로 기록되어 나타난다. 특히 조선 왕조가 수도를 한강 유역에 정하고, 5대 진도의 하나로 관리하면서 버들꽃나루는 세상에 그 이름을 드러냈다.

나루에는 배들이 드나들고 정박하여 사람이나 물건을 내려 주는 특별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강 연안에는 주로 깎아지른 절벽 또는 모래펄이 이어지는 습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곳도 배를 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양화진은 나루의 양쪽 끝에 자연적으로 부두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남쪽에는 선유봉, 북쪽에는 잠두봉을 중심으로 비스듬하게 모래톱이 형성되어 배를 대기가 수월했다고 한다. 

절두산은 양화진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로 예전부터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오늘날 절두산이라고 불려지는 이 봉우리는 조선 때의 지리책인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에는 가을두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원래 우리 말의 ‘들머리’, 즉 머리를 높이 든 형상을 가리키는데, 지금도 절두산 근처에서 대대로 살아온 노인들은 이곳을 ‘덜머리’라고 부른다. ‘덜머리’는 아마도 ‘들머리’가 변화된 말로 보인다. 또한 불쑥 솟은 자세가 누에가 머리를 든 모양 같다고 하여 잠두봉이라고도 불렀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이 이름이 나오는데, 강희맹은 그 형상을 자라의 머리에 비겨 이렇게 적고 있다. “서호는 도성에서 10리도 안 되게 떨어져 있는데, 산이 푸르고 물이 푸르러 형승이 나라에서 제일간다. 호수 남쪽에 끊어진 언덕이 있는데 형상이 큰 자라 머리 같으며 혹은 잠두라고 불린다. 언덕의 발부리가 호수 가운데 뾰족하게 바늘처럼 나왔고 형세도 높아서 호수 가운데 승경을 모두 볼 수 있다.” 

잠두봉과 비슷한 지명으로는 잠두령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데, 조선 때의 실록에 따르면 성종 때 이곳을 그렇게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곳은 형세가 용의 머리 모양 같다고 하여 용두봉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그냥 용산(龍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오늘날 불리는 절두산이라는 명칭은 잠두봉의 원명칭이 아니다. 한국 순교자 현양회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인의 신앙을 현양하기 위해 잠두봉 일대 1,381평을 구입할 당시,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인이 참수형으로 목잘려 죽은 곳이라 하여 절두산이라고 불러 왔다는 그 지역 일대 주민들의 구두 전승을 받아 잠두봉을 절두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데서 기인하고 있다. 즉 교회측의 통속적, 신심적 호칭일 뿐 고래의 원명칭은 아니다. 

양화진은 어떤 곳이었나?

양화진은 한강도, 노량도, 삼랑도와 함께 한강의 주요 나루로서 이곳을 건너면 양천-부평을 거쳐 인천으로 이어지는 길과 양천-김포를 경유하여 강화로 통하는 길이 이어진다. 특히 양화진은 서울에서 강화로 통하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유사시 피난로를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조선 시대 내내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조선 정부는 초기부터 나루 관리를 담당하는 도승을 두고 진선을 배치하여 나루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만전을 기하려 하였다. 

▶통행의 길목 
한강의 5대 나루로서 정비된 양화진은 단지 강을 건네주는 나루였을 뿐 아니라 배를 타고 강화, 배천 등지로 갈 수 있는 교통의 기점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중종 때의 사례를 보면, 양화진에서는 배 한 척에 행인 1백여 명이 승선하고 나루를 건너기도 하였다. 황해도 지방으로 가려는 일부 사람들은 걸어서 가는 불편을 피하려고 양화진에서 배를 타고 떠나기도 하였고, 황해도 쪽에서 서울로 진입하려는 사람들도 배편으로 거슬러 와서 이곳에 상륙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곳은 조선 후기 간선 도로 제9로의 노선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 노선 상에는 일찍부터 양천, 김포, 강화, 부평, 인천 고양, 양주, 한양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발달해 있었다. 그리하여 각 지역의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분주하게 오갔다. 더구나 이곳은 결절지(結節地)의 핵심에 있었기 때문에 대륙에서 남으로 진출하고자 하면 압록강, 대동강을 건너 개성을 지나 장단, 파주를 거쳐 일산 방면, 또는 벽제 방면으로 나누어져 이곳에 이른다. 몽고의 침입이 그러했고 후금의 침입이 그러했다. 한편 남에서도 북으로 진출하고자 하면 부산, 목포 쪽에서 각기 대구, 전주를 지나 대전쪽으로 향하는 경우에는 천안, 수원을 지나 이곳을 통해 북진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으니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그러하였다. 이렇듯 양화진은 통행의 길목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검문소이며 운송 기지 
양화진은 검문소로서도 그 역할이 막중하였다. 특히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변란이 자주 일어났으므로 위정자들은 반역자나 범죄자 등 위험 인물을 단속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는데, 나루를 왕래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는 이런 우범자들도 끼여 있었다. 법을 어기고 도망가는 사람들도 그 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루를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막는 것은 나루의 책임자인 도승의 임무였다. 도승은 도승관에 상주하면서 아랫사람들을 감독하여 안전하게 나루를 통행하게 하고, 우범자를 검문하는 일을 맡았는데, 도승이 이 일을 소홀히 하였다가 사고를 내면 문책을 받아야 했다. 태종 17년에는 세자 양녕대군이 양화진을 건너간 사실을 국왕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도승 서사민이 하옥되고 국문까지 받았다. 

또한 도승은 중국의 사신이나 정부의 고관들이 행차할 때에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선 초에는 세도 가문의 자제들이 도승 자리를 장악하고 위세를 부리며 극심한 횡포를 부렸다. 심지어 양화 도승은 중국의 사신이 행차하는 데도 나와 보지 않아 직무 유기로 처벌되기도 하였다. 양화진은 나루터인 동시에 포구로서 온갖 운송선이 지나다가 잠시 정박하던 곳이었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이미 한강의 운송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한 위정자들은 조선 초기부터 국가의 세곡을 선박으로 운반하는 조운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주된 조운로는 서해 연안에서 강화도 해협을 지나 한강을 거슬러 서강, 용산 등지로 운항하는 것이었는데,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등지의 세곡선 수백 척은 해마다 일정 시기가 되면 강화도 해협으로 몰려들었고, 거기에서 한강으로 진입하여 통진·공암진·양화진을 경유하여 중앙 정부의 창고인 경창이 있는 서강이나 용산에 이른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상품 화폐 경제가 진전되면서 전국 각지의 산물이 민간 선운업자들에 의해 한양으로 집산되었다. 그리고 지방에 흩어져 있던 양반들의 농장에서 거둔 소작료도 대부분 한양으로 운반되었다. 그들의 운송로 역시 세곡선의 조운로와 거의 흡사하였다. 이에 따라서 양화진은 온갖 운송선의 경유지가 되었다. 한편 도성 사람들의 연료로써 외방에서 채취한 땔나무와 숯, 볏짚과 밀짚 따위도 운반되어 이곳에서 하역되었다. 

따라서 양화진 인근에는 그러한 운송선을 점검하는 점검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한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진입하려는 배들은 행주 염창항 부근에 있던 험한 여울 때문에도 양화진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염창항 부근에는 19세기에 들어 갈대가 우거지고 모래가 쌓여 큰 배가 잘 다니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수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양화진의 책임자는 그들 선박을 안내할 의무도 있었다. 

▶뱃놀이의 명소 
양화진은 한강의 여러 나루 중에서도 그 주변 경관이 특히 빼어나 뱃놀이의 명소로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산악 지대에서 굽이굽이 흘러 온 한강은 송파진, 두모포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물살이 거칠지었만 용산, 마포를 지나면 유속이 완만할 뿐 아니라 수심도 깊지 않아 강물이 맑고 깨끗해서 뱃놀이나 고기잡이를 하기에 좋았다. 더욱이 북쪽 언덕에 있는 잠두봉의 소나무와 남쪽 나루터 옆에 우뚝한 선유봉은 서로 마주보며 절경을 이루고 있어서 숱한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풍류를 즐겼다. 인근 망원동에는 세종 7년 효령대군이 별장을 마련하고 정자를 지어 풍류를 즐겼고, 성종 때는 월산대군이 자주 여기에 머물면서 문신들과 시회를 열기도 했다. 

조선 중기의 문인인 이총은 이곳에 별장을 두고 문인들을 맞아 배를 타고 유람하며 천 편이 넘는 많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또한 연산군 때 사람으로 연산군과 이곳에서 술을 마시던 성희안이 “聖心元不愛淸流”(임금은 본디 맑은 흐름을 좋아하지 않네)하고 비판하여 읊조리자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성희안을 이조 참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 지기도 한다. 아무튼 이곳 양화진의 물은 유난히 맑고 갈매기가 많아 옛 문인들의 시에도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겨울눈은 진풍경이어서 양화답설은 서울 십영(十詠)에 속할 만큼 유명했다. 

양화진은 특히 중국 사신들이 좋아했던 명소의 하나로서 조선 정부는 중국 사신들이 오면 으레 이곳으로 안내하여 환대하면서 교유하였으니, 이를테면 국제적 외교 구락부였던 곳이다. 여러 기록들을 검토해 보면, 그들은 뱃놀이를 매우 좋아해서 한강도 인근 제천청에서 연회를 시작하여 흥이 오르면 배를 타고 즐기면서 내려오다가 양화진에 이르러 하선하여 다시 시회를 즐겼다. 실록 기사에 의하면 태종 8년 6월에 서울에 온 명나라의 사신 황엄 등이 양화진 북쪽 가을두에서 유람한 것을 비롯하여 사신이 올 때마다 양화진 일대에서 유람하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 되었다. 이곳의 경치가 좋다는 소문이 중국에 퍼져서 조선에 오는 사신마다 양화진 유람을 요구하였고, 세종 11년에 온 사신 창성과 윤봉은 양화진에서 배를 타고 나가 조강으로 가서 직접 황어를 잡기도 하였다. 특히 세종 때 왔던 예겸은 천하의 절승지라면서 양화진의 경승을 좋아했다. 그는 귀국해서도 양화진의 경승을 자랑하여 후에 조선에 오는 사신들이 모두 양화진을 찾고자 했다. 

▶처형·제사·진휼 하던 곳 
양화진은 때때로 특별한 장소로도 활용되어 처형장 또는 제향의 장소, 흉년 때 백성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누어주는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조선 왕조의 위정자들은 죄인의 잘못을 널리 알려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할 때에는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죄인을 처형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장터가 처형 장소로 자주 활용되었는데, 칠패 난전이 있던 남대문 밖 염천교, 경강상인의 근거지였던 용산의 새남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으며, 지방에서도 장날에 사람들이 잔뜩 모인 가운데 죄인의 목을 잘라 경각심을 갖게 하였다. 

양화진 역시 그러한 의미에서 처형장이 되었다. 나루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갔으며 배를 기다리느라고 머무는 사람들이 많아 항상 북적거렸기 때문이다. 명종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대윤 일파가 크게 숙청되었는데, 그 우두머리 윤임을 양화진에서 효수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 영조 때는 금주법을 어긴 죄인이 노량진 나루터에서 효수된 바 있다. 근대에 이르러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일본, 중국 등지로 망명하다가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체를 양화진에서 다시 효수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앞서 병인박해 때에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잠두봉 아래에서 처형되는 바람에 지명까지 절두산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한편 양화진은 중요한 나루터였기에 이곳에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용왕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물에서 사고가 나면, 용왕님이 화가 나서 파도를 크게 일으켰기 때문이라면서 그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하였다. 지금도 해안 지방에서는 고기잡이를 나갈 때 용신에게 고사를 드리는 풍습이 남아 있다. 그런데 호랑이를 제물로 바치면 용왕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선 왕조에서는 나라에서 호랑이를 잡아 그 머리를 강에 집어넣는 제향을 지냈는데, 그 장소가 양화진이었다. 그리고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서 가뭄이 드는 것도 용왕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하여 나루터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그 장소도 양화진이었다. 세종 때에는 양화진 서쪽 언덕에 있는 효령대군의 별장에 행차했던 왕이 기우제를 지낸 후 기다리던 비가 왔다 하여 그곳 별장에 희우정이라는 이름을 내렸던 일이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성종 때 월산대군이 이곳을 고쳐 짓고 망원정이라 하였다. 지금의 망원동이라는 동명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나루터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인 데다가 농촌에서 흉년으로 파산하여 고향을 떠난 유이민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이 점을 헤아려 흉년 때가 되면 나루터에서 구호 물자를 나누어주기도 했는데 양화진 역시 그러한 장소의 하나였다. 

▶병선의 훈련장 
양화진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이곳이 병선의 훈련장이었다는 점이다. 조선 왕조는 처음부터 해양을 어떻게 방어할지에 대해 고심하였다.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해서 조운을 못하게 되자 국가 재정이 위태로워졌을 뿐 아니라 민심이 흉흉해지고 정세가 몹시 불안해지는 바람에 결국 고려 왕조가 쇠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새로 정권을 잡은 조선 왕조로서는 왜구를 조속하게 진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에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즉위 초부터 수군을 정비하고 병선을 증강시키는 데 힘썼다. 이러한 태조의 정책은 태종, 세종, 문종에 그대로 이어져 일정하게 수군이 정비되고, 상당수의 병선이 건조되었다.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의 수군은 5만여 명에 이르렀고, 병선은 8백여 척이나 되었다. 

새로이 증강된 수군과 병선은 그대로 전선에 투입될 수 없었다. 상당 기간 훈련을 해야만 실전에서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고, 또 아무 곳에서나 훈련할 수 없었다. 양화진 부근은 당시 한강 일대에서는 병선을 훈련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하천의 폭이 넓고 물살이 완만하여 크고 작은 병선들이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고, 수심이 낮아 훈련 도중 수군들이 물에 빠져도 곧 구할 수 있었다. 더구나 병선을 훈련시키는 데 관심이 많았던 국왕들이 쉽게 찾아가서 살펴볼 수도 있었다. 

1419년 쓰시마 정벌을 추진하던 태종은 왜선을 능가할 수 있는 소형의 삼판선(三板船)을 건조하게 하고, 이를 양화진에서 시험하게 하였다. 이듬해에는 군기감과 병조에 명하여 전함을 새로이 건조하여 이를 양화진에서 시험하게 하고, 직접 양화진에 거동하여 그 모습을 관람하기도 하였다. 세종 26년에는 왕세자를 비롯한 여러 대군들이 양화진에 가서 병선에 화포를 장치하고 양화진 양편에서 이를 쏘아가면서 훈련을 감독하였다. 이때의 훈련은 왜선으로 가정한 가상 적군과 조선 수군 선박들이 벌이는 모의 전투 실험이었다. 병선의 훈련 도중에 나룻배도 동원되어 함께 훈련하기도 하였다. 

▶군사 진영이 되다 
사람들이 오가는 통행의 길목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나루는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차츰 군사 기지로서 주목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중인 선조 30년(1597년) 9월에 대사성 김우옹은 한양은 넓고 커서 방어하기가 곤란하므로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여러 나루를 방어의 거점으로 해서 일본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조선에 다시 침입한 왜군이 전투에서 패하여 물러나는 바람에 이 주장은 실현되지 않았다. 

한강에 있는 여러 나루의 군사적 중요성이 다시 부각된 것은 인조 2년(1624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고 인조 5년(1627년)에 정묘호란, 인조 14년(1636년)에 병자호란을 겪게 되면서였다. 이러한 전란을 겪은 후 정부에서는 전체 국방 체제를 정비하면서 도성의 방어 체제를 강화하였다. 아울러 한강의 각 나루에 진선을 마련하고 진부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려는 노력도 진행되었다. 효종 6년(1655년) 10월에 공조에서는 각 나루터에 지급하는 위전을 사대부들이 차지하는 바람에 뱃사공들이 생계를 이을 수 없고 배를 제때에 수리하지 못하는 폐단이 있다고 왕에게 알리고 위전을 더 지급하여 진선을 마련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국왕은 각 나루에 규정대로 위전을 지급하고 진선을 충분히 갖추도록 하였으며 위전을 차지한 자들을 처벌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진선을 함부로 끌어다 자신의 일을 시킨 양반을 적발하여 엄히 다스리게 하였다. 이어서 왕실이나 관아, 세력가를 막론하고 진선이나 진부들을 개인적인 일로 이용하는 자가 있으면 엄벌에 처하라고 다시 한 번 지시하였다. 

효종 때 이후 나라에서는 북벌을 기본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었으며 정부에서는 항상 청이 다시 침입해 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유사시 강화도로 피난하거나 한강 이남으로 도읍을 옮기기 위해 한강의 나루들을 관리하고 진선을 확보하며 도로 정비를 강조하였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숙종 때 후반 이후 한강의 나루들은 피난 경로로써 뿐만 아니라 유사시 방어 거점으로 활용하는 쪽으로 성격이 변화하게 된다. 

숙종 28년(1702년) 10월에 병조 판서 이유는 유사시 강화도나 남한산성으로 피하기 위해서 꼭 경유해야 하는 양화도·갑곶진과 삼전도·송파진에 진선을 확보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건의에 따라 이듬해 5월에는 예전에 도승과 서리를 파견하였던 한강도·노량도·양화도·삼전도·임진도 등 5대 나루에 군영의 별장과 무사를 파견하여 나루의 통행을 관리하게 하였다. 별장은 진선을 정비하고 관리하며 나루터 검문을 맡았고, 나룻배를 부리는 실제의 진부는 강 마을의 사람들 가운데 50명을 모집해서 역을 면제 해주고 번갈아 진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숙종 29년(1703년) 8월에 또 다시 병조 판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임진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열흘간 왜군이 한강을 건너려는 것을 저지하였던 일과 정유재란 때 왜구가 다시 침입하는 것에 대비하여 유성룡이 한강 방어 계획을 세웠던 일들을 사례로 제시하면서 한강 방어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에 따르면 국가에서 나룻배를 둔 것은 단순히 행인을 건네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세가 위급할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관리가 소홀하여 진도마다 나룻배가 배치되어 있으나 연한이 찼는데도 개조하지 않은 것이 많고 사사로이 사용하는 사례도 많으므로 나룻길이 거의 통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를 단속하고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각 진도를 군영에 속하게 하고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제안은 숙종 36년(1710년) 10월에 법으로 정해져 한강의 주요 나루에 진을 설치하고 군영에 소속된 별장을 두었다. 삼전도는 총융청에, 한강도는 훈련도감에, 양화도는 어영청에, 노량도는 금위영에 소속시켜 각 영에서 직접 별장을 뽑아 배치하고 진군을 통솔하며 유사시에 대비하여 조련을 행하도록 한 것이다. 이제 한강과 주요 나루는 유사시 신속한 피난을 도울 수 있는 통로의 역할뿐 아니라 해상을 따라 침공하는 적을 막아 싸울 수 있는 거점이 되었다. 

한강 방위 체제가 실질적으로 기능을 발휘한 것은 영조 4년(1728년)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였다. 반군이 청주를 점령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총융청 군사들을 중심으로 토벌대를 편성하여 남쪽으로 보내는 한편, 황해도 장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동작진 부근에 주둔하게 하였다. 아울러 한강의 각 나루에 순사를 배치하고 경계령을 내려 통행하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작은 나루는 주변의 큰 나루에 통합하여 사사로이 한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다. 또 진선은 모두 북쪽 강변에 모아 두었다가 강을 건너려는 행인이 많이 모였을 경우에만 철저히 검문한 후 건네주도록 조치하였다. 반군의 이동을 제한할 뿐 아니라 첩자가 한양에 잠입하거나 유언비어를 유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군들이 여행객처럼 꾸미고 각처 나루에서 만나 도성에 잠입하기로 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강변은 더욱 엄격하게 단속을 강화했으며 한양에 있는 각 군영은 한강의 나루들을 분담하여 경계에 임하였다. 반군의 예상 접근로가 아닌 양화진 등에도 한강을 통행하는 조운선을 보호하기 위해 역시 경계가 강화되었다. 

영조 30년(1754년)에는 양화진에 정식으로 군사 진영을 설치하였다. 군진이 설치된 양화진에는 93칸의 진사가 있었다. 별장과 교련관 등 관속들은 이곳에 머물면서 공무를 수행하였고 창고를 두어 환곡과 군량을 관리하였다. 소속 진선은 모두 15척이었는데 양화나루에는 10척이 있었고, 금천 쪽의 간포에 2척, 공암진에 1척, 동작진에 2척이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양화진을 비롯한 한강의 주요 나루에 별도의 군진을 세우고 별장을 비롯한 관원을 둔 것은 한강을 도성의 방어선으로 삼고 주요 나루를 거점으로 삼아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양화진의 군사적 중요성이 다시 부각된 것은 병인양요 때였다. 이 사건으로 양화진은 피난처인 강화도로 가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해상을 통해 침공한 외적과 싸우기 위한 한강 연안의 중요한 방어 거점이 된 것이다. 

고종 3년(1866년) 8월에 영종도 부근에 나타난 프랑스 함대의 일부 함선들은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주변 지형을 정찰하고 수심을 측량하였다. 조선은 염창 부근에 한강을 가로질러 전선을 배치하여 이들의 진로를 막으려 하였으나 프랑스군의 집중 포격을 받고 전열이 와해되고 말았다. 한강 양안에서도 프랑스 함대를 향해 포격을 가하고 화전을 발사하였으나 사정거리가 짧아 이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프랑스 함대는 8월 18일에 양화진을 거쳐 서강까지 진출하였으며 강에서 하루를 정박하였다. 정부에서는 어영중군 이용희가 지휘하는 마병 2초, 보병 7초의 병력을 양화진에 보내어 강변을 방어하게 하고 다른 군영에도 경계령을 내려 출동 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아울러 궁성의 호위를 강화하고 각 성문에 병력을 배치하여 경계를 철저히 하였으며 도성 안 각처를 순찰하고 단속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접전은 없었으며 프랑스 군함들은 다음날 한강을 돌아 내려가 강화도 남쪽 작약도 부근에서 대기하던 본대와 합류하여 귀환하였다. 프랑스군이 물러난 후 조정에서는 각지의 수군을 증강시켜 해상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강화도와 한강 연안의 방비를 보강하고 병력을 증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력을 채 증강하기도 전에 프랑스군이 다시 침입해 왔다. 조선에 처음 출동하여 한강변 정찰을 마친 프랑스군은 한강의 수심이 그리 깊지 않고 연안의 방비 태세도 무시할 수 없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한강에서 함대 작전을 펴는 데는 장애가 많으며 상륙하여 한양을 공격하려면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한강의 관문인 강화도를 점령하여 조선에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로 결정하였다. 

9월 초에 다시 조선 해역에 나타난 프랑스 함대는 9월 7일에 강화도에 상륙하여 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훈련대장 이경하와 총융사 신관호에게 명하여 한강변에 직접 나가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였으며 양화진에 총융진을 출진시켜 한강을 방어하는 거점으로 삼도록 하였다. 이어 9월 8일에는 임시 수도권 방어 사령부에 해당하는 기보연해순무영을 창설하여 프랑스군의 침공을 격퇴하도록 하였다. 순무영은 금위영 안에 설치되었으며 먼저 훈련도감의 군사와 각 군영의 군사를 더하여 총 2천여 병력의 부대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도성을 떠나 양화진을 거쳐 김포와 통진을 통해 강화도 방향으로 출전하였다. 9월 9일에는 한성부 좌윤 정규응을 소모사로 임명하여 의병에 지원하는 자들을 모아 양화진을 지키게 하였고, 9월 15일에는 수원에서 징발한 군사 5백 명을 추가로 배치하였다. 양화진은 한강 하류 지역을 방어하는 중요 거점이자 강화도 탈환을 위한 교두보가 된 것이다. 

순무영군을 지휘한 천총 양헌수는 통진과 덕포진 등 프랑스군의 상륙이 예상되는 지역에 병력을 집중 배치하여 상륙을 저지하려 하였다. 갑곶진을 통해 강을 건넌 프랑스군 정찰대와 조선군이 문수산성에서 충돌하여 양측의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자, 조선군은 덕포진을 거쳐 은밀히 강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잠복하였다가 접근하던 프랑스군을 격파하였다. 프랑스군은 조선의 저항이 완강하여 무력으로 항복을 받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자 10월 5일에 철군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프랑스군이 철수한 후에도 양화진의 계엄 상태와 병력 배치를 계속 유지하였다.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아직 조선 해역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다시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프랑스군이 완전히 철군한 것이 확인된 10월 15일이 되어서야 한강변 일대의 경계를 해제하고 동원된 군사들을 해산하였다. 양화진은 병인양요 기간 내내 한강 방어선의 중심 거점이자 군사들의 주요 이동 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양화진 일대의 땅은 어떻게 이용되었나? 

한양이 번성하면서 양화진 일대의 토지 이용 방법, 취락의 기능과 교통로의 발달도 크게 달라졌다. 조선 후기까지 한양은 일반적으로 도성 안과 도성 밖 공간을 뚜렷하게 구분했다. 내사산을 잇는 성벽을 울타리로 삼아 발달한 한양의 성내 면적은 약 17㎢에 불과하여 공간만으로는 한성부 총 면적의 1/10에도 못 미쳤으나 조선 초에는 총인구의 90% 이상을 수용하였고, 구한말에도 55%의 인구를 포용했었다. 반면에 도성 밖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자연 상태의 공간으로서 비좁고 혼잡한 생활환경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나고자 하는 도성 주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였다. 다시 말하면 도성 밖은 임야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일부 지역만이 과수원·채소밭으로 이용되었으며 저지대는 습지로 남아 있었다. 조정은 이러한 자연 생태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도성 밖 10리 정도를 경계로 성저십리 지역을 설정하여 개발을 억제해왔다. 그런데 같은 성저십리 지역일지라도 동교·남교·서교·북교는 자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차이가 컸다. 즉 북교는 북한산을 끼고 있어 풍치가 수려하여 계곡에는 북촌 양반들의 별장, 정자, 과수원 등이 많이 분포하였으며 북한산성을 비롯한 군사 시설도 적지 않았다. 동교는 제단·사묘·동적전·왕릉 등이 분포하여 왕실과 관리들의 출입이 잦은 지역이었고, 남교 역시 왕실의 행차가 많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서교에는 연희궁과 용산·마포 일대의 창고 외에는 별다른 시설이 거의 없었으나 한강변에 전개되는 풍치는 가장 광활하고 웅대하였다. 그러므로 양화진·성산·망원정·선유봉·공암 등지의 절경은 중국에서 온 사신들과 우리 나라 사대부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정선을 비롯한 화가들의 화폭에도 담겨졌다. 

서교의 승경은 한강, 강변의 산봉우리, 숲, 정자 등 자연 풍경과 인공 시설들의 조화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서교의 승경은 범위가 넓어 용산(남호) 팔경, 마포 팔경, 서호 팔경, 양천 팔경, 파능 팔경 등으로 나누는데 그 범위는 용산에서 행주산성까지 이어진다. 

《택리지》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 때에 용산호의 연꽃을 보기 위해 어가가 머물렀다는 용산에서 양화진에 이르는 5㎞의 강변은 조선 시대에 46개소의 정자가 분포할 정도로 명성이 높은 곳이었다. 그중에도 양화진 일대의 경치가 가장 유명하여 많은 시문에 묘사되었다. 《한경지략》에는 “양화진은 경치가 좋아 명나라 사신들이 매양 그곳에 나가 놀며 시를 지었다. 명나라 사신 예겸·고윤·진감·기순 등 여러 사람의 시들이 모두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또 대매암의 외국 죽지사에 ‘양화진 어귀에 핀 붉은 살구꽃 팔도가 조선 풍류를 노래한다’라는 글귀는 양화진이 중국에서도 이름이 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중략)”라고 하였다. 양화진 일원의 경관은 서강역으로부터 양화진에 이르는 300m 거리에 조성된 버드나무 후자 숲, 잠두봉의 울창한 송림과 느티나무 고목이 양화진·망원정·제천정·파청루 등의 인공 시설들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명성을 얻은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양화진·행호 일원에는 선유봉·이수정·소요정·공암·소악루·개화사·낙건정·위래정 등 이른바 양천 팔경이 분포하였는데, 특히 선유봉의 소나무 숲이 가장 빼어난 절경으로 꼽혔다. 조선 시대 한양 지역의 누정 161개 가운데 양화진에서 용산 사이에 46개소, 양천 팔경에 12개소, 노량진 일대에 5개소 등 63개의 누정이 집중되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류층이 도성 밖 경치가 빼어난 곳에 별장을 짓고 피서지나, 휴양지로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 관행이었다. 이러한 별장은 기와집, 이엉을 얹은 집 외에도 정자나 누각을 짓고 서재를 꾸몄으며 상당한 면적의 농토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곳에는 정자를 관리하고 농사를 지을 노비 또는 소작인이 상주하였다. 

《북부장호적》을 분석해 본 결과 도성 밖 16개 계(契)의 총 호수 681호(2,302명) 중 약 53%가 도성 안에 거주하는 양반의 노비인데, 그들은 양반들을 위해 고기잡이, 토지경작, 정자관리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양화진 인근의 말흘산계와 신사동계 등지에는 토지를 경작하는 노비 8호가 있었고 합장리와 망원정리에 고기잡이를 하는 노비 8호, 망원정과 합장리에 정자를 관리하는 노비 다수가 거주하였다.상류층이 소유한 농장은 망원정 일대에 국한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종실록》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초에 한양 근·원교에는 세력자의 농장이 많았던 것 같다. 1900년대 초 고양·양천·김포 등지의 비옥한 토지 중 상당한 면적이 서울에 거주하는 지주의 소유로 관리인이나 소작인에게 맡겨 경작되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농토뿐 아니라 심지어 갈대밭까지 세력자들이 소유하여 갈대를 지붕 재료나 연료로 팔아 이득을 챙기고 있었다. 대표적인 갈대밭으로 갈천(지금의 안양천) 유역의 초루지벌, 창릉천 하류, 굴포천 유역의 벌말, 일산들의 노점, 김포의 홍도평 등지를 들 수 있는데, 특히 오늘날의 목동에 해당되는 갈대밭은 면적이 53결 이상에 달하여 각 궁방과 세력자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양 서교의 토지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주로 채소밭으로 이용된 자연 제방 위의 농토였다. 이 땅은 하천의 운반 물질이 퇴적된 것이어서 매우 비옥하다. 그러나 계속 경작하는 땅이라 지력이 감퇴되기 쉽기 때문에 많은 양의 시비를 해야 하는데, 다행히 서교의 농민들은 농선을 이용하여 밀물 때는 수확물을 소비 시장으로 수송하고 썰물 때는 도성에서 수거한 분뇨를 채소밭까지 운반할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 일산, 김포, 양천 등지의 농선 출입이 가능한 자연 제방 위에는 농막과 대형 분뇨 저장고들이 분포했었다. 

서교의 농업 발달상은 조선 후기 《경세유표》, 《연암집》, 《산림경제》 등 실학자들의 저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다산은 6향(도성 내)과 6수(도성 밖 근교)에 각각 과수원과 채소밭을 만들어 도성 안에서 소비되는 과일과 채소의 공급 기지로 삼을 것을 권하고 있다. 또 홍만선은 한양의 과수원에서는 아홉 가지 과일을 재배하고 도성 밖에서는 파·부추·마늘·무·오이·호박·배추·쑥갓·상추 등 아홉 가지를 주로 재배하고, 그 밖에 참외·수박·시금치·미나리 등도 파종하도록 권하였다. 이러한 작물들은 파종기와 수확기가 서로 다른 것이 많아 겨울을 제외하면 작물을 바꿔 연중 집약적으로 재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연암은 도성으로부터 거름을 공급할 수 있는 근교의 농민들은 상품의 채소를 생산하여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논에 미나리 두 마지기를 심으면 벼 열 마지기를 심어서 얻는 이익을 올릴 수 있고, 밭에 채소 두 마지기를 심으면 보리 열 마지기를 심어 수확하는 것과 같은 이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도시화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 김포·고양 등 한강 하류 충적 평야 지대는 미약하나마 근교 농업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 1930년대 후반의 자료를 보면 김포군에서는 막대한 양의 배추·무·파·미나리·마늘·오이·호박·수박·참외 등을 생산하였으며, 수확물의 대부분이 서울로 출하되었다. 

양화진 일대에는 누가 살았나?

조선 사회에서는 물가나 도로변을 살 만한 곳으로 여기지 않았다. 길은 질병과 미풍 양속을 해치는 이롭지 못한 요소들을 나르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는 상업 도시나 항구 도시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였다. 현대의 가치관으로 볼 때 취락이 형성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평가되는 장소가 조선 시대에는 살 만한 장소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배층이 기피하였기 때문에 서민층들이 점유하여 생활 터전으로 키운 요지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용산·마포·서강·양화진이다. 이 지역은 서·남해로 통하는 해로의 중심이자 한강 중상류, 임진강 유역과도 통하는 수운의 요지였다. 그뿐 아니라 교하, 파주를 거쳐 경기 북부와 통하고 노량진, 금천, 수원을 거쳐 경기 남부와 연결되고 양화진, 양천을 경유하여 강화, 인천까지 연결되었다. 특히 개항기에는 인천과 서울을 연결하는 수륙로의 요지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 취락이 형성된 것은 조선 초에 조운 제도가 확립된 데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한강 지역에 발달한 포구로는 하류로부터 조강포, 이산포, 행주외리, 양천 후포, 염창, 양화진, 서강, 마포, 용산 등 아랫강 포구와 서빙고, 한강리, 수철리, 뚝섬, 송파, 광진 등 윗강 포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포구 가운데 규모로 보나 기능으로 보나 용산과 마포가 다른 포구들보다 단연 앞섰다. 

용산은 삼남 조운의 중심으로 일찍이 군자감별영의 창고가 설치되었으며 삼남의 대동미를 수납하는 강창이 입지하였고 광흥창 역시 용산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용산에 운송되는 품목은 미곡이 대부분이었으나 면포와 마포도 적지 않았으며, 이러한 물품을 거래하는 세곡 주인이라는 상인들과 물품의 하역 및 수송을 업으로 삼는 인부 집단들이 주민의 주류를 이루었다. 인부들은 운부계, 마계, 모민계, 역인계 등의 생활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마포에는 광흥창과 풍저창이 있었으나 이곳은 일반 화물에 해당하는 전국의 어염선이 집결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를 배경으로 취락이 형성되었다. 《택리지》에 “온 나라의 물자를 수송하는 배들이 모여들어 백성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으므로 이득을 노려 부자가 된 사람이 많은데, 오직 경강이 첫째”라 하였듯이 마포 강변에는 여각 주인들의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인 계급은 외국 문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강하였으며 이에 대한 정보는 곧 부를 쌓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뛰어난 기동력을 발휘하여 전국 각지의 지리적 정보는 물론 외국 문물에 관한 정보도 빠르게 수집하였다. 도매상인으로 성장한 이곳 주민들은 18세기 무렵부터 강상부민(江上富民)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므로 개항기의 마포 포구 사진에는 부호들의 대저택과 창고 건물이 즐비하였다. 실제로 20세기 초 한성부 부·방별 가옥 간수를 보면 용산방은 기와집의 비율이 27.8%였으며 21간 이상의 대저택도 3.2%에 달하였다. 용산방의 기와집 비율은 도성 안의 북촌 및 종로 일대보다는 낮았으나 평균치(6.9%)보다 월등히 높고 도성 안의 일부 지역에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용산에서 마포를 거쳐 양화진에 이르는 포구에 형성된 취락의 경관은 비슷하였을 것이다. 이 지역은 지형적으로 구릉과 계곡을 이루고 있어 취락이 발달하기에 불리했는데도 언덕 위의 급경사지에 가옥이 밀집하였고 미로형 골목이 가옥들 사이로 통하였다. 서강은 마포와 유사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규모는 작은 편이었다. 그리고 서강·망원동·합정리는 어선 포구의 기능도 겸하고 있었다. 

경강선은 대부분 서강 농암과 마주보고 있는 여의도 북쪽의 밤섬에서 건조되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한강 남쪽의 금천에 가까운데도 행정적으로는 한양의 서부 서강방 율도계에 소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섬이 경강 상업의 기동력을 좌우한 조선 및 선박 수리의 기지였기 때문이다. 6·25전쟁 전까지 밤섬에는 150가구 이상의 주민이 거주했으며, 한강 유로 개선 사업으로 밤섬을 폭파하기 직전에 62가구(443명)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양화진 일원의 인구는 조선 후기 경강 수운과 포구 상업의 발달에 의해 급증하였으나 근대적 교통 기관의 도입으로 한때 증가 추세가 주춤하였다. 그러나 서대문-마포 간 전차 개통에 따라 도성 접근이 용이해지면서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 후기의 인구 증가는 한성부의 행정 구역 개편과 수도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고취시켰다. 

조선 초의 성저십리는 기능상으로 서울이라기보다는 농촌에 가까웠기 때문에 행정적으로 시골과 같이 면리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영조 3년 도성 안 인구가 급증하면서 해발 50m의 고지대까지 시가지가 형성되고 도성 밖으로도 주거지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한양의 생활권이 넓어지자 연희궁 서쪽 능선을 따라 정했던 성저십리의 경계를 주민 요청에 따라 모래내까지 옮기고, 면리제 대신 도성의 부방제와 같이 북부에 상평방·연은방을, 서부에 용산방과 서강방을 설치하였다. 정조 때인 1788년에는 다시 서부에 연희방을 신설하여 망원리, 합정리, 성산리 등을 귀속시켰다. 《호구총수》에 따르면 18세기 후반 만초천 서안의 청파역으로부터 오늘날의 효자동·원효로·도화동·마포·만리동·마포동·토정동 일대를 포함하는 용산방 인구는 약 15,000명, 양화진·서강리·망원동 일대의 서강방에는 6,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지도첩》, 《도지지》, 《호구총수》, 《대전조례》, 《경성 오서 호구 명세표》 등의 자료를 보면 한성 5부의 시대별 인구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데, 18세기 전반 양화진 일원에 속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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